* 2019년 큐오넷(CUONET)에서 작성했던 제 글을 가져왔습니다.
│영감을 위해 보내는 시간
뉴턴(Isaac Newton)이 사과가 떨어지는 장면만을 보고 만유인력을 생각해냈다고 하면 극적이겠지만, 실상 최소 몇 년을 '왜 지상 위의 모든 것들이 땅으로 떨어질까'에 대해 생각해왔겠죠.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사과'는 뉴턴이 생각해냈던 수만가지 영감 중에 한가지를 구체화시킨 사건이자 도구라 보는게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워쇼스키 남매자매가 형제였던 시절 영화 <매트릭스 (The Matrix, 1999)>를 제작했는데, 당시 스탭 중의 한명의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촬영 중 스탭들이 어떻게 할지 몰를때 워쇼스키 형제에게 물어보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라구요. 어릴 때부터 심취했던 만화나 애니메이션, 영화나 음악, 형제끼리 공유했던 수많은 공상 SF 스토리들.... 그들이 10대와 20대를 통해 구상해왔던 세계관이 영화 <매트릭스>를 통해 집대성된 거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모든 대답을 다 할 수 있다는 얘기는 모든 부분에 대해서 치밀하고 디테일하게 생각하고 설정해두었다는 말이니까요.
영화 <인터스텔라 (Interstellar, 2014)>는 극본 작업을 위해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동생 조나단 놀란(Jonathan Nolan)이 캘리포니아 공대의 세계적 이론 물리학자 킵 손(Kip S. Thorne)에게 4년간 상대성이론 등 천체물리학을 배운 것은 유명한 일화입니다. 두 형제가 우주에 관한 영화를 언젠가 만들기 위해 어릴때부터 공상의 나래를 펼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자신이 써야할 작품에 대한 스스로의 이해를 위해 4년을 투자하는 것은 엄청난 일입니다.
│음악예술의 특징
음악인은 다른 예술계통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작품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한 작품(한 곡)의 결과물이 보통 3~4분 내외로 결정되고, Verse, Chorus 등 반복되는 구간이 있으며, 보컬과 기타 한 대로도 좋은 곡을 만들 수 있습니다. 능력만 있다면 작사, 작곡부터 마스터링까지 수행할 수 있으므로, 한 사람이 한 작품을 온전히 만들어 발표까지 할 수 있는 어떻게보면 시스템적으로는 완성된 장르이기도 합니다.
내가 비록 인디음악을 하고 있어도 언제 어느순간 상업적으로 연결될 수 있기에, 인디와 상업의 구분이 크게 의미없는 곳이기도 합니다. 거대 기획사의 대규모 마케팅을 뛰어넘을 수가 없고, 대중앞에 선보여야하는 예술로서 마케팅과 밀접하게 연결될 수 밖에 없지만, 최소한 음악만으로 1대 1 승부를 보고자 한다면 20년 경력의 음악인과 이제 갓 음악을 시작한 6개월된 음악인이 모두 경쟁해야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곡이 쏟아지고, 다양한 음악적 장르가 떠오르다 사라지거나, 다시 융합되기도 하고, 한 사람의 예술가가 산술적으로는 평생에 걸쳐 수백여개의 작품을 낼 수 있는 예술이라고 본다면, 결국 음악은 대중에게 영감을 주기 이전에, 음악인들 스스로 지속적으로 영감을 받아야 계속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길 수 밖에 없습니다.
│영감의 각인
다만, 불행하게도 우리가 절대적인 영감을 받는 시기는 정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보통 10~20대 중반에 걸쳐 있으며, 마음을 뒤흔드는 음악이나 퍼포먼스를 만났을 때의 느낌은, 성별에 따라 또 다르겠지만 첫사랑의 그것과 비슷할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각인(刻印)'이라고 표현하고 싶네요. 한번 각인된 무엇은 평생 그 사람의 머리와 가슴 속에 존재합니다.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시대에 살았다면, 그의 퍼포먼스를 눈앞에서 볼 기회를 얻은 적이 있다면, 마이클 잭슨의 한 곡, 한 퍼포먼스에 엄청난 영감을 받았을 확률이 높아집니다. 향후 그 예술가의 작품은 장르는 달라도 어딘지 모르게 마이클 잭슨의 향수를 내포하고 있을 확률도 높아지겠죠. 마이클 잭슨의 영감과 아티스트적인 면모와는 별개로 그의 앨범이 대중에게 발표될 때까지는 기획사나 프로듀서에 의한 치밀한 상업적인 계산과 정교한 마케팅이 포함되었겠지만, 어린 우리들은 그 모든 것을 'Art'자체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유투브의 시대에 BTS는 단지 음악뿐만이 아니라 퍼포먼스를 함께 전세계에 보여줄 수 있는 힘을 얻었고, 현재의 10대들은 음악과 퍼포먼스가 합쳐진 BTS의 그것을 하나의 'Art'로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있을 겁니다. U2를 들으며 영감을 받았던 세대들은 이해못할 확률이 높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10대들이 후에 아티스트가 되었을 때 '어릴 때 BTS를 들으며 영감을 받았습니다'라는 얘기들을 하고 있을 겁니다.
드리고싶은 말씀은, 이 '각인'을 받을 수 있는 시간대가 매우 한정적이라는 겁니다.
길어봐야 5년, 짧게는 2~3년 내에 '각인'될 수 있는 예술 장르를 받아들이고, 이후 모든 받아들이는 모든 예술이 그 '각인된 예술'에 기초하게 됩니다. 힙합을 좋아하던 청년이 힙합에 포함된 재즈 샘플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 본래의 재즈 샘플을 찾아듣다가 재즈도 괜찮게 받아들이는 식이죠. 음악인으로서 이런 식의 이야기는 좀 무섭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제부터 내가 50년간 발표할 예술작품들이 모두 이 짧은 5년 안에 받은 영감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각인된 예술'을 반복할수록 더 잘하게 되고, 익숙하게 되고, 전문가가 됩니다.
나이가 많고 경력이 출중한 포크 뮤지션이 이제서야 각종 EDM 음악을 섭렵한다면 분명 꽤 괜찮은 경지에 이르겠지만, 10대때부터 힙합과 함께 EDM을 즐기로 춤을 추고 그 비트에 영감을 받은 아티스트에게는 있는 '무엇'이 없을 확률이 높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의 포크 감수성이 20대 초반의 EDM뮤지션과의 협업을 통해 좋은 콜라보 형태로 대중에게 선보일 수는 있을 겁니다. 대신 이 EDM뮤지션도 이후 새로운 장르에 심취해 어린 시절을 보낸 더 어린 세대의 뮤지션의 '그것'을 따라가지 못하겠죠.
│아티스트의 자세
결국 아티스트의 숙명은 어릴 때 받았던 '각인된 예술'에서 그치지 말고 지속적으로 영감을 찾아 헤매고 자신을 변화시키고 새로운 것을 오픈된 마인드로 받아들여야한다.....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새로운 예술 형태를 보면,
"저런건 예술이 아니야"
하면서 무시할게 아니라
"오..이런게 생겼어? 누구야?"
라는 호기심을 보이는 분들이 더 많은 영감을 받겠죠.
마음이 오픈될 수록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이 커지고, 그 그릇안에 더 많은 영감을 담을 수 있다 생각합니다.
한 사람의 예술가가 10곡의 명곡을 만들었다면 그 10곡을 위해 그가 보낸 시간은 어마어마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10분 안에 멜로디를 쓰고 바로바로 DAW를 통해 3시간만에 완성했다는 말을 믿을 수 있는 것은, 그 '10분'을 위해 그가 보냈을 '10년'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재즈 뮤지션의 즉흥연주를 보고 감탄할 수 있는 것은,
그를 위해 수많은 phrase를 연습해오고 단련해온 시간에 대한 찬사일겁니다.
안타깝게도 그 뮤지션의 수준을 가름하는 것은 그 즉흥연주에 섞인 그의 '1%'의 영감이 되겠지만요.
그래서 우리가 게을리 하지 말아야할 것은
음악 뿐만 아니라 새로나오는 모든 예술의 형태에 대한 깊은 관심과 감상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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