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른 블로그에 제가 썼던 글을 수정, 추가하여 다시 배포합니다


재즈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아니더라도 마치 손으로 기록한듯한 코드와 멜로디로 이루어진 악보를 본 적이 있다면, 리얼북일 확률이 높습니다. 2000년 이전에 기타좀 친다는 분들이 한권 이상씩 가지고 계셨던 가요모음대전집이나 교회의 복음성가 모음집들도 리얼북과 그 형태가 같습니다. 


리얼북 (Real Book)은 애초에 유행가 악보의 모음집 같은 것인데, 정확히는 유명한 재즈곡들의 리드 시트 (lead sheet)들을 모아 편찬한 책을 말합니다. 코드와 멜로디는 물론 가사까지 적혀 있는 종합 선물 세트죠. 1970년대 버클리 실용 음악 대학 (Berklee Coleege of Music)의 학생들이 의기투합하여 처음 제작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보통 1st Edition이라 부릅니다. 


그 이전에는 페이크 북 (Fake Book)이라 해서, 역시 유명 재즈곡들의 코드 변화 (Chord Change)와 가사를 기입한 책이 있었는데, 저작권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가사의 경우 현재는 저작권법의 완벽한 보호 아래 있지만, 당시에는 보호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코드 (Chord)의 경우에는 저작권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코드의 조합으로 무한대의 곡들은 탄생할 수 있으나 우리가 인식하기에 '유효한' 코드 진행은 정형화될 수 밖에 없으므로, 창작의 기틀을 위해 저작권법을 적용하지 않습니다. 즉, 유명한 곡의 코드 진행을 그대로 가져와 멜로디와 가사만 완전히 바꾸면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따로 가사에 대한 저작권을 지불하지 않는 이상 각 회사에서 편찬한 페이크 북은 보통 멜로디와 가사 없이 코드 변화만 기입되어 있고, 악기에 따라 C, Bb, Eb 등으로 키를 변화한 버젼 들이 있습니다. 


버클리 학생들이 작업한 것은 바로 이 페이크 북을 기초로 멜로디와 가사를 기입한 것이죠. 아마도 처음에는 본인들의 수업과 공부의 목적으로 제작했을 테지만, 사실 완전한 불법이었습니다. 정식으로 작곡가, 작사가들과 라이센스를 체결한 것도 아니어서 저작권법에 위배되는 상황이었고, 그래도 결국 음성적으로 퍼지는 결과를 나았습니다. 


그만큼 실용적이었죠. 재즈 클럽에서 항상 연주하는 유명 스탠더드 재즈 곡들을 빠른 시간에 습득할 수 있었고, 특히 앙상블 (Ensemble)에 효과적이어서 같은 악보를 공유하면서 합주하기 편리했습니다. 재즈곡의 경우 작곡가가 곡을 쓰면서 악보까지 편찬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듣는 사람에 따라 코드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자가 제각각인 악보를 가져와서 합주를 하게 되면, 서로의 코드나 멜로디를 비교하는 데에 시간을 쏟게 되고, 많은 시간을 비효율적으로 소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80년대 유학을 다녀왔던 분들이 유학시절 구한 리얼북을 가지고와서 국내에서도 클럽 연주에 사용하기 시작했고, 90년대부터 차츰 학원의 교재나 개인 레슨 수업 자료로 퍼지게 됩니다. 그렇게 재즈 리얼북 볼륨 I (Real Book Volume 1)이 알려졌습니다. 


그 이후 Volume II, III가 나왔는데, I 에서 다루지 못했던 인기 있는 재즈곡들이나 I 이후 유명해진 곡들을 추가하여 편찬했습니다. 


이 모두가 1st Edition 입니다. 


2~5th Edition 들은 잘못된 부분 등을 수정하거나, 어레인지를 더욱 정교하게 고쳐서 낸 버젼들입니다. 컴퓨터 작업으로 깔끔한 악보로 출력한 버젼까지 등장했죠. 그런데 희한하게도 1st Edition 이 그동안 너무 퍼졌고, 버클리에서 공부했던 학생들이 각 나라에 가져가 퍼뜨리는 바람에, 오랜 기간 동안 각 클럽에서는 1st Edition을 스탠더드로 삼고 연주해왔고, 가르치거나 배우는 사람들도 1st Edition 을 사용했기에, 더 정확한 기보인 2~5th Edition 들이 인정받지 못하는 기현상이 벌어집니다. 


잘못된 코드 체인지라도 '그게 재즈지'라고 받아들여지게 된거죠. 


일각에서는 '버클리 학생들'이라고 알려진 리얼북의 제작자가 바로 베이시스트인 스티브 스왈로 (Steve Swallow)와 피아니스트인 폴 블레이 (Paul Bley)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작곡가인 스튜어트 발콤 (Stuart Balcomb)도 꽤 참여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습니다. 그들의 앨범이 'Real Book'이라는 명칭을 차용하였고, 디자인마져 시중의 리얼북과 같았기 때문이죠. 


* 이들의 이름이 거론되는 이유는 이들이 퍼뜨린 리얼북으로 인해 작곡가나 작사가들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아무런 수익을 얻지 못하게 되는 불법을 저질렀지만, 동시에 리얼북으로 인해 오늘날의 훌륭한 뮤지션들이 성장하는 발판을 마련했기 때문입니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죠. 물론 본인들은 본인들의 행위(?)에 대해 함구한 채로 있습니다. 자칫 인정하는 순간 수백억의 벌금을 내야할 수도 있죠. 


세월이 흘러 음악 서적 관련 출판사 Hal Leonard (http://www.halleonard.com/)가 각 Edition들의 시장성을 판단하고 참조하여 원래의 1st Edition으로 회귀한 리얼북 6 에디션 (The Real Book 6th Edition)을 출판합니다. 이는 정식으로 저작권료를 지불하는 합법적 출판물로 현재 세계적으로 가장 스탠더드로 인정받고 있는 버젼입니다. 5th Edition에 포함된 137곡을 제외하고 새롭게 90곡을 추가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초창기 업계에 퍼져있던 불법 리얼북 1~5th Edition의 자연스러운 도태를 위해서 이전 리얼북들의 음성적 제본본보다 더 싸게 판매가를 책정해서 판매하였고, 전략이 성공하여 정통성도 인정받고, 합법적인 출판물로 뮤지션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무척 인정할만한 똑똑한 전략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40이 판매가이며, 해외직구로 밖에 구할 수 없어서 5만원 이상이 있어야 구입가능합니다. 


* 가난한 뮤지션들에게는 피같은 돈이겠으나, 반대로 얘기하자면 뮤지션으로서 이런 주옥같은 곡을 5만원으로 구입할 수 있음을 감사하게 여기지 않고, 아무런 거리낌없이 불법으로 제본을 만드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Hal Leonard는 6th 리얼북의 성공을 힘입어 크리스마스, R&B, 보컬 리얼북 등을 편찬하기 시작했고, 모두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어 '스탠더드'로 대접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Hal Leonard의 리얼북 시리즈

다만, 1st Edition으로 공부하고 연주했던 뮤지션들과 2000년대 들어 6th Edition을 사용하는 뮤지션들과의 온도차이는 약간 있습니다. 아무래도 완전히 잘못된 코드나 멜로디는 수정을 가할 수 밖에 없고, 신구 세대가 만나 합주를 하는 과정에서 이런 차이가 발견되는 합니다. 


즉, 사실 재즈 스탠더드는 '많이 알려진', '널리 공연되는' 곡들의 모음이고, 누군가가 기보하여 '해석'한 것이 바로 리얼북이므로, 정답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왠만한 곡들은 인터넷에서 검색가능합니다.

멜로디는 물론 가사 및 해당곡의 mp3도 검색을 통해 '무료로' 구할 수 있죠. 

'개인적인 목적'으로 '비영리성'에 입각하여 이러한 자료를 구한다고 할지라도 엄연히 저작권법을 위배하는 '불법'이며, 음악 업계의 건강을 해치는 일임을 명심하셨으면 합니다.